“이런 수모를 겪느니 차라리…” 잘나가던 50대 은행원들이 스스로 짐을 싸는 진짜 이유


오랜 시간 대한민국에서 ‘은행원’이라는 이름은 부와 명예, 그리고 무엇보다 견고한 ‘안정성의 요새’를 상징해 왔습니다. 하지만 최근 금융권의 풍경을 들여다보면 그 요새의 성벽이 근간부터 흔들리고 있음을 직감하게 됩니다.

평생을 바쳐 지점장 자리에 올랐지만 지점 통폐합으로 갈 곳을 잃고 캐피털사 심사역으로 발길을 돌린 A씨, 그리고 수십 명의 부하 직원을 거느리는 대신 단 2~3명이 근무하는 소규모 출장소장으로 밀려난 부지점장 B씨의 사례는 더 이상 특별한 뉴스가 아닙니다. 한때 금융의 꽃이라 불리던 50대 시니어 뱅커들이 왜 스스로 짐을 싸며 정들었던 일터를 등지고 있는지, 그 이면에 숨겨진 잔인한 효율성의 논리를 분석해 보았습니다.


’20대보다 높은 퇴직률’ – 3년째 이어지는 시니어 엑소더스

최근 은행권 인력 구조는 기이할 정도로 역전되어 있습니다. 인공지능(AI)의 확산과 채용 시장의 한파로 인해 취업 문턱을 넘은 20대 직원들은 악착같이 자리를 지키는 반면, 정년을 앞둔 50대 이상 직원의 퇴직률은 매서운 상승 곡선을 그리고 있습니다.

데이터를 보면 이 현상의 심각성이 명확히 드러납니다. 4대 금융지주의 50세 이상 직원 퇴직률은 2023년 12.01%에서 2024년 12.32%, 그리고 지난해에는 14.67%로 치솟았습니다. 3년 연속 가파른 상승세를 보이며 어느덧 15% 돌파를 목전에 둔 셈입니다. 이는 퇴직률이 7.7%까지 떨어진 30세 미만 직원들과 대조되는 모습으로, 조직의 허리를 지탱하던 숙련 인력들이 급격히 빠져나가는 ‘시니어 엑소더스’ 현상을 증명합니다.


사라진 지점장 자리와 ‘단순 창구 업무’로 내몰린 현실

이러한 이탈의 근본적인 원인은 비대면 금융의 확산으로 인한 ‘지점의 종말’에 있습니다. 은행권 국내 지점 수는 2012년 6,757곳으로 정점을 찍은 이후, 불과 10년 만에 전체의 3분의 1이 사라졌습니다. 지점이 사라진 빈자리는 ‘출장소’라는 소규모 점포가 채우고 있는데, 바로 이 지점에서 시니어들의 자존심은 무너집니다.

과거 수십 명의 직원을 지휘하며 지역 금융의 거물로 통했던 ‘지점장’들이 이제는 단 2~3명이 근무하는 출장소에서 직접 예·적금을 받는 ‘단순 창구 업무(단순 여·수신)’를 수행해야 하는 처지에 놓인 것입니다. 최근 3년 사이 출장소 수가 25% 이상 급증했다는 사실은, 숙련된 시니어들이 느낄 입지 축소와 심리적 박탈감이 얼마나 광범위하게 퍼져 있는지를 여실히 보여줍니다.


디지털 전환이 불러온 ‘효율화’의 잔인한 그늘

은행들이 지점을 없애고 출장소로 대체하는 명분은 명확합니다. 바로 ‘비용 절감’과 ‘수익성 중심 경영’입니다. 하지만 디지털 전환이라는 화려한 구호 뒤에는 고연차 인력을 밀어내는 차가운 구조조정의 칼날이 숨어 있습니다.

“이런 수모를 겪을 바엔 차라리 제2의 인생을 살겠다”

실제로 우리은행은 최근 한 번에 37곳의 점포를 통폐합하며 강도 높은 조직 슬림화에 나섰습니다. 더욱 충격적인 것은 ‘시니어’의 기준이 점점 낮아지고 있다는 점입니다. 하나은행은 최근 희망퇴직 대상을 만 40세 이상으로 대폭 확대했습니다. 이제 은행권에서 위기는 50대만의 문제가 아니라, 40대 중반만 되어도 조직의 ‘효율성’ 잣대 앞에 서야 하는 가혹한 현실이 되었습니다.


“조건 좋을 때 떠나자” – 합리적 탈출이 된 희망퇴직

상황이 이렇다 보니, 시니어 은행원들 사이에서는 조직 내에서 버티는 것을 미덕으로 여기던 과거의 가치관이 사라지고 있습니다. 대신 ‘희망퇴직 조건이 조금이라도 좋을 때 선제적으로 나가자’는 실리적인 인식이 지배적입니다.

지난해 5대 시중은행에서 짐을 싼 희망퇴직자 수는 총 2,470명으로, 전년 대비 무려 24%나 급증했습니다. 이는 2021년 이후 최대 규모입니다.

“은행도 인력 슬림화에 속도를 내고 있어 고연차 중심의 구조조정 바람이 더욱 거세질 것”

시중은행 관계자의 말처럼, 관리자급 자리가 사라지는 상황에서 시니어들은 이를 ‘제2의 인생’을 준비하기 위한 마지막 기회로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조직의 슬림화 요구와 개인의 생존 전략이 맞물리며, 은행권의 숙련된 경험치가 현장을 떠나고 있는 것입니다.


맺음말 및 생각할 거리

급격한 디지털 전환과 AI 기술의 파고는 화이트칼라의 상징이었던 은행원이라는 직업을 뿌리째 흔들어 놓았습니다. 인공지능이 신입 행원의 자리를 대신하고, 모바일 앱이 지점장을 대신하는 시대에 숙련된 시니어들의 노하우는 ‘비용’이라는 이름으로 치부되고 있습니다.

이것은 단순히 한 산업군의 인력 감축 문제일까요? 평생을 바쳐온 일터에서 효율성이라는 논리 아래 밀려나는 숙련된 시니어들의 경험과 통찰은, 과연 우리 사회의 다음 단계에서 어떻게 활용되어야 할까요? 우리가 이들의 퇴장을 방관하는 사이, 우리 사회는 거대한 ‘숙련 자산’의 손실을 겪고 있는 것은 아닌지 진지하게 고민해 보아야 할 시점입니다.